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다 민족 (문단 편집) === 기원전 1150년경 람세스 3세의 해적 방어 === >람세스 3세 폐하 8년...[* (발췌자 주석) B.C. 1188년] >외국 나라들이 그들의 섬에서 음모를 꾸몄다. 소동{{{-2 (騷動)}}} 속에서 땅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흩어졌다. 그들의 무력 앞에서 [[히타이트|하티]], 코데, 갈그미스, 아르자와, [[키프로스|알라시야]][* (책 속 주석) 하티는 [[히타이트 제국]], 코데는 [[킬리키아|실리시아]] 해안과 북시리아, [[카르카므쉬|갈그미스]]는 유프라테스의 도시, 아르자와는 실리시아 안 또는 근처, 알라시야는 아마도 [[키프로스|깃딤]]일 것이다.] 등이 일시에 잘려나가 남은 땅이 없었다. 아모르의[* (책 속 주석) 아마도 북시리아 평원 또는 코일레 시리아] 한 곳에 진지가 세워졌다. 그들은 그 백성들과 그 땅을 완전히 황폐화시켜, 그곳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만들었다. 그들은 이집트로 오고 있었으며, 그들 앞에는 불길이 준비되었다. 그들 연맹에는 [[필리스티아|블레셋]], 체커, 셰켈레시, [[그리스|덴옌]], 웨셰시[* (책 속 주석) 블레셋을 제외하고는 이 이름들은 이집트 글에 가깝게 옮겨졌다. 체커에 대해서는 웬아몬 이야기를 참고하라. 셰켈레시는 시켈로스, 덴옌{{{-2 (설형문자로는 다누나)}}}은 [[헬라스|다나오이]]일 것이다. 웨셰시는 후대의 어느 민족과도 쉽게 연결시킬 수 없다.] 등의 나라들이 참여하였다.[* (발췌자 주석) 이 문헌 텍스트는 테베에 있는 메디네트 하부의 람세스 3세 신전의 것이다.] >----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590322| 《고대 근동 문학 선집》]]{{{-1 (''Ancient Near East Texts'')}}} 487-488쪽.[* 원서에선 262-263쪽.] James B. Pritchard 편집, 강승일 역 제20왕조 [[람세스 3세]]의 치세 중 기록된 몇 가지 문서에서, 람세스 3세는 바다 민족의 침입에 맞서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이를 기념해 더이상 바다 민족은 없다며 승전을 기록했다. 해당 기록에서는 바다 민족이 해안에 침공했으나 이집트가 강력한 방어를 구축하여 막아내고 모든 무기를 바다에 다시 내던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결코 바다 민족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결사적인 투쟁 중에 이루어진 사기 고취용 기록으로 보아야 할 부분이 많다. 실제로 이집트는 이후 제20왕조 람세스 6세에 이르러 거의 붕괴에 가까운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이집트 본토 바깥에 널리 뻗치던(특히 [[근동]] 지방, [[가나안]]) 영향력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이집트의 개별적인 약화가 아니라, 서구 후기 청동기 시대 세계 전체의 붕괴의 한 축이라 할 수 있다. 히타이트 제국과 바빌로니아 지방, 그리스가 동 시기에 다 함께 멸망했고,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백년에 걸친 긴 암흑기가 찾아왔다. 따라서 해당 기록은 아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집트가 연쇄적으로 붕괴하는 국제 무역망의 타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사적으로 발버둥치던 기록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후 이집트는 남쪽의 누비아, 서쪽의 리비아, 동북쪽의 가나안 등 여러 지역에 대한 외세의 공격과 반란을 기록하고 있다. 람세스는 누비아 전쟁, 1차/2차 리비아 전쟁, 북부지역 전쟁 등에서 승리하는 등 나름 성공적으로 국가를 지켜냈지만 경제적으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특히 아시아 방면에 대한 영향력 상실은 심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